(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나치가 발흥하자 독일에 있던 공산주의자와 지식인들은 소련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 사정도 만만치 않았다. 히틀러는 막무가내였지만 스탈린은 교묘했다. 그는 끊임없이 의심하며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시험했다.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명령 00439호'에 따르면 소련에 거주한 독일인 5만5천5명이 간첩 등의 혐의로 잡혀 들어갔다. 그중 4만1천898명이 총살됐고, 1만3천107명이 장기간 투옥됐다. 독일공산당 집행위원회 인사들은 히틀러보다 스탈린 손에 더 많이 희생됐다.
독일계 영국인 역사학자 카트야 호이어가 쓴 '장벽 너머: 사라진 나라, 동독 1949-1990'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명멸을 다룬 묵직한 역사서다. 히틀러에게 쫓겨 소련으로 떠난 독일인들이 동독을 세워 사회주의 실험에 나선 후 끝내 실패하기까지의 도정을 그렸다.
저자는 동독의 마지막 국가원수였던 에콘 크렌츠, 대중가수 프랑크 쇠벨과 같은 유명인뿐 아니라 교사·경리·노동자·경찰 등과 같은 일반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칫하면 놓칠 수 있는 동독의 역사를 세밀하게 복원한다. 648쪽에 이르는 비교적 긴 호흡의 책이지만 빠른 이야기의 전개 덕택에 지루할 틈이 별로 없다. 무엇보다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 있는 시각과 그에 기반한 섬뜩한 문장은 수작으로서의 풍모를 드러낸다.
책에 따르면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갔다가 총살 위기에 직면한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의심 많은 스탈린에게 충성을 입증해야 했다. 그들이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밀고'였다. 전설적인 공산주의 여전사 로자 룩셈부르크와도 함께 활동했던 빌헬름 피크, 그리고 그보다 몇 배는 음흉한 발터 울브리히트는 겉모습은 상냥했지만 속은 무자비했다. 그들은 부지런히 동료를 고발했다. 독일공산당 정치국원 9명 가운데 스탈린의 대숙청 속에서 살아남은 이는 피크와 울브리히트 두 명뿐이었다.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의 편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동참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 전장에서 펼쳐졌다. 살인과 강간 등 수많은 전쟁 범죄가 잇달았다. 가장 큰 희생자는 힘없는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저자는 스탈린 군대가 독일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200만명 이상이 강간당했다고 말한다.